이란의 유대인 Iranian Jew 분류없음2011-05-10 22:14:45

중동 및 서남 아시아지역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라는 어디일까?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놀랍게도 이란이다. 이란과 유대인과의 관계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오래 되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적대적敵對的이라기보다는 상호보완적相互補完的인 관계로 드러나고 있다. 이스라엘이 아랍측의 석유무기화로 서구 세계와 단절되어 있을 때 이란은 이스라엘의 또 다른 창문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반대로 이란이 서구로부터 고립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이란의 숨은 이웃의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럼에도 두 국가는 표면적으로는 상대를 비난하고 악의 축이라고 욕을 한다. 이런 표면적인 것으로만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고찰한다면 아랍인들이 주축을 이루는 중동에서 히브리인과 페르시아인이 주축을 이루는 두 국가의 내면적인 관계를 놓칠 수 있다.

 
⑴고레스B.C559-529

기원전 539년 가을 바빌론을 점령한 페르시아의 황제 고레스Kyrus는 <바빌론의 황제>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는 이듬해 바빌론 통치 제 일 년을 맞이하여 바빌론의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칙령을 반포한다.

<페르시아의 황제 고레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를 올라가게 하여라.2역대기 36, 23>

<페르시아의 황제 고레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이제 그들은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도록 하라.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각 지방 사람들은 그 곳에 이 백성의 남은 자들이 머무르고 있으면,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의 집을 위한 자원 예물과 함께, 은과 금과 물품과 짐승으로 그들을 모두 후원하도록 하라. 에즈라 1,2-4>

세계사에 키루스Kyrus대제로 알려진 고레스는 구약성경의 이 구절로 인해 이스라엘의 역사에 구원자로 등장하게 된다. 그가 왜 느부갓네살Nebukadnezar에 의해 멸망한 뒤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칙령에 의해 이스라엘 유민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공동체를 재건한다. 이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고레스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방자로 부각된다.

<나는 고레스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나의 목자. 그가 나의 뜻을 모두 성취시키며 예루살렘을 두고 ‘그것은 재건되고 성전은 그 기초가 세워지리라.’고 말하리라”이사야44,28>

<주님께서 당신의 기름부음 받은 이에게, 당신께서 오른손을 붙잡아주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시니 민족들을 그 앞에 굴복시키고 임금들의 허리띠를 풀어버리며 문들을 열어 제치고 성문들이 닫히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사야45,1>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은 고레스에게 최상의 명예를 헌상한다. “기름 부은 자” 즉 메시아Messiah라는 칭호를 준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지배층들이 고레스를 자신들의 왕정이 무너진 뒤에 이를 다시 재건하게 하는 중요한 도구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을 자신들만의 역사에서 세상의 역사 속으로 개입하는 모습으로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하느님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자신의 도구로 그 어느 누구라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 자신들을 멸망시킨 자라하더라도 그는 하느님의 징벌의 도구로 혹은 기억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고레스가 성경에서 맡은 역할이었다.

기원전 6세기경 첫 번째 성전이 바빌론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이스라엘인들이 포로로 끌려가 이국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끌려온 유대인 공동체는 바빌론과 그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물론 이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끌려온 사람들에게는 일생이 되었을 것이다. 바빌론에서 유대인들은 제한적이지만 집단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이들은 그발 강과 텔아빕이란 곳에서 생활한 것으로 추측된다(에제키엘 1,1ff). 이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비참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진정한 포로는 유대의 여호야긴 왕과 그 수행원 정도였을 것이다. 다른 끌려온 유대인들은 느부갓네살 사후 특사를 받아 반자유민의 삶이 가능하였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에게 바빌론의 삶은 유랑의 삶이며 포로의 삶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만큼 타향살이는 외롭고 고달픈 것이었다.

유대인들에게 바빌론의 삶이 위기로 다가온 것은 자신들이 고수한 종교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키는 개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사실 예루살렘 신전 중심의 종교는 유대 왕국이 멸망한 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바빌론에서는 매일 성전에 바치는 번제燔祭의 제물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성전 중심의 종교가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에 랍비들은 이전의 종교를 새롭게 정화하려 하였다. 그것은 성전의 종교가 아니라 언약의 종교였다. 랍비들은 바빌론의 포로 생활은 자신들이 믿는 야훼 하느님의 무력하기 때문이 절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것은 야훼의 무능력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에 대한 야훼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재해석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이제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 다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있다는 점 또한 명확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에 바빌론의 유대인들은 절망의 현장에서 희망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희망의 약속 아래서 고레스는 등장하게 된 것이다. 고레스는 유대인들에게 야훼의 도구로 자신들의 참회와 회개를 받아들인 야훼가 보낸 해방자로 해석된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페르시아는 역사 속에서 신앙으로 만났던 것이다.

 
⑵에스텔 서書The Book of Esther

키루스 대제의 칙령 이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 유대인들은 그대로 제국의 영내에 눌러 앉아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스텔 서의 이야기를 보면 유대인들은 그리 환영받는 집단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에스텔 서의 배경은 아하스에로스Ahaserus 왕 시대인데 대략 기원전 485에서 464년 사이이다. 물론 에스텔 서는 유대인들의 축제인 푸림Purim절의 기원을 이야기하고자 저술된 책이지만 페르시아 통치시기에 유대인들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의 처지가 열악했다 해도 에스텔 서에서는 야훼 하느님이 항상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믿음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서도 이스라엘이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회개하고 야훼 하느님 품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야훼 하느님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받아준다는 믿음 또한 확고하게 드러나 있다.

에스텔 서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페르시아 제국 속에서 자신들만의 종교와 관습을 지키며 제국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이스라엘을 기회만 있으면 해코지 하려는 하만Haman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있었다. 에스텔 서에서 부각시키는 이스라엘과 하만의 대립은 오래된 역사적 사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만의 족보를 보면 아각 사람 함다다의 아들로 소개된다. 그런데 여기서 아각이란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무엘 서에 보면 아각은 아말렉 족의 왕으로 나온다(1사무엘 15,8). 아말렉족은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민족의 숙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족속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맛싸와 므리바에서 머물고 있을 때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르비딤에서 싸웠다(출애급17,8-16).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야훼 하느님이 맛싸와 므리바에서의 일을 잊지 않고 아말렉 족을 보는 족족 쳐부수라는 명령을 내려 글로 기록한다(신명기25,17-19).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는 관용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결과 페르시아 제국 안에 살고 있는 민족들은 민족, 문화, 종교의 고유한 생활을 하도록 허락받았다. 이 정책은 거대한 제국을 굳건히 하는데 일조 하였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정책에 따라 제국 내의 소수 민족들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관용정책으로 인해 왕국 안에서 아말렉 족의 아각사람 함다다의 자손과 이스라엘 사람 모르드개의 양녀 에스텔이 대립하게 된다. 결국 하만이 몰락함으로서 이스라엘인들은 절멸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런 사정을 볼 때 페르시아 제국에서 이스라엘의 위치는 소수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제국의 지배층을 배출했지만 박해의 위험이 상존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에스델 서의 교훈적인 의미나 전례적인 의미를 떠나서 이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이스라엘 인들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부분적인 박해를 받았지만 이스라엘 인들은 제국 내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며 고위직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⑶파르티아 왕조 시기

역사상 파르티아 제국은 로마제국에 버금가는 막강한 왕국이었다. 로마제국은 지중해를 내해內海로 삼고 이베리아 반도, 갈리아, 그리스, 소아시아, 팔레스티나 지역으로 제국을 확장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라인 강 너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것은 게르만 인과 파르티아 제국 때문이었다. 라인 강 진출은 토이토부르그 전투에서 바루스의 로마 군단이 전멸하면서 좌절되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크라수스가 카르하이Carrhae 전투에서 파르티아의 장군 사파보드 수레나Spahbod Surena에게 대패하고 전사함으로서 좌절되었다-플루타르크영웅전 크라수스전 참조.

로마인들은 게르만과 파르티아에서의 패배를 역사의 기록에서 무시함으로서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켰다. 하지만 라인 강 이동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맹주는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게르만 족과 이란인이었다. 수많은 인종이 거론되는 구약성경에는 파르티아 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파르티아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면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게르만 인과 파르티아 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몹시 즐겼다. 타키투스는 로마 인들의 나태함과 유약함을 게르만 인과 파르티아 인의 상무적인 모습을 통해 비교함으로서 끊임없이 본래의 로마 인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강조하였다.

파르티아와 로마와의 계속적인 대립 속에서 바빌론에 거주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파르티아를 지지하였다. 이것은 팔레스타인에 있던 유대인들이 로마에 지지를 보낸 것과 유사하였다. 파르티아는 바빌론의 유대인을 보호하였고,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로마가 보호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방해받지 않는 한 지상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았다. 이것은 유대인들 사회의 장점이며 단점이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의 이런 모습은 통치자들에게는 신뢰를 받는 요인이었지만 기회주의적인 모습으로 비치기도 하였다.

파르티아 제국 시절 바빌론의 유대인들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바빌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유대왕국의 멸망 이후 유대인 공동체를 자치적으로 운영하였다. 이들은 로쉬 갈루투Rosh Galut라는 공동체의 우두머리를 임명하였다. 이 직책은 명예직이었지만 유대인들은 다윗의 가문에서 이들을 임명함으로서 유대의 역사적 통일성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 직책은 11세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⑷사산 왕조 시기226-634

226년 겨울 사산 왕조의 위대한 건설자 아르다시르Ardashir 1세는 파르티아의 마지막 왕인 아르타바누스Artabanus 4세를 타도하였다. 헬레니즘의 영향 아래서 파르티아 왕조는 종교적 관용책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사산 왕조에서는 페르시아적 삶을 강화하였다. 팔라비 어를 사용하고 구래의 일신교 신앙이었던 조로아스터교를 왕국의 공식 종교로 인정하였다. 이 결과 다른 종교들은 탄압을 받았다. 바흐람Bahram 2세 시절 조로아스터 성직자들은 사산 왕조의 지배자들이 분쇄를 선언한 종교-유대교, 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등-들을 억압하기 시작하였다. 이 결과 제국 내의 유대인Yahud, 불교도Shaman, 힌두교도Brahman, 나자렛파 교도Nasara, 기독교도Kristiyan, 세례교도Makdag와 마니교 신도Zandik들이 박해를 받았다. 이들 종교의 신상은 파괴되었고, 신들을 모시는 신전은 소멸되었다.

샤푸르Shapur 1세는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보였다. 샤푸르와 유대인 사무엘의 우정은 제국의 유대인 공동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샤푸르 2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다. 이로 인해 유대인 공동체는 종교적 자유와 많은 이익을 가질 수 있었다. 샤푸르 2세 역시 바빌로니아 출신의 랍비인 라바Rava와 우정을 나누었다. 이 우정으로 라바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유대인에 대한 억압법을 제정하는 것을 늦추고 유대인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⑸초기 이슬람시기634-1255

이슬람 제국은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교인 그리고 조로아트터교인까지도 ‘경전의 사람들Dhimma'라고 하여 존중해 주었다. 이슬람에서의 경전은 크게 토라Torah, 자부르Zabur, 인질Injil, 코란Koran을 들 수 있다. 토라는 구약의 모세오경을 말하고, 자부르는 구약의 시편을 말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시편 가운데 다윗이 지은 것에 한정한다. 그리고 인질은 신약의 사복음서를 말한다. 이들 비 이슬람 이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는 대신 지즈야Jizya라는 인두세를 납부해야만 했다. 이들 딤미Dhimmi-비이슬람교도인 경전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들은 병역에서도 면제되었다. 특히 이슬람 치하에서 유대인들은 다방면에서 활약하였다. 이들의 분야는 의학, 정치, 경제 등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란에 이슬람이 유입된 시기는 두 시기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사산 왕조 말기 호스로우 2세 때 이다. 호스로우 2세가 예루살렘과 다마스커스를 정벌하고 전리품으로 가져온 예수가 못박혔다는 십자가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에서 무슬림이 사산 왕조의 군대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란에 본격적인 이슬람의 유입은 사산 왕조를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아부바크르가 정복하고 점령지를 이란 고원으로 확장하면서 부터이다.

 
⑹몽골 점령기1256-1318

1255년 훌레구의 페르시아 지역을 시작으로 몽골의 이슬람 지역 공략이 시작되었다. 훌레구의 공세가 시작된지 3년 후인 1258년 바그다드가 함락되고 압바스 왕조가 괴멸되었다. 그리고 이란 지역은 몽골의 일 칸국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일 칸국 역시 모든 종교를 동등하게 대우하였다. 그리고 딤미들의 불평등한 관계 역시 폐지하였다. 이들 일 칸국의 칸들은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들을 자신들의 군사지휘관으로도 임명하였고, 유대인 가운데 왕국의 고위관리Vizir로 임명된 사람도 있었다.

훌레구는 불교도였지만 기독교-엄밀히 말해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아내인 도쿠즈 카툰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란을 정복하였을 때 그곳에 불교도가 없는 반면 네스토리우스파, 야고보파, 아르메니아인, 그루지아인, 유대인 등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을 통합하기 위한 훌레구의 정책은 모든 종교와 인종을 관용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훌레구는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를 동등하게 대했지만 자신은 죽을 때까지 불교도로 남았다. 그리고 훌레구는 페르시아 학문의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일 칸국의 역대 칸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정복지의 백성과 관리들이 이슬람교를 신봉한 반면 자신들은 비교도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관리들은 이방의 군주에게 충성심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배권을 확고히 하는 방법은 지배자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이었다.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한 칸들에 의해 제국에 위치한 기독교회당, 유대교회당, 불교사원이 파괴되기는 했지만 이슬람의 지즈야 정책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일 칸국의 칸 가운데 가잔 치세에 이슬람화가 가속되었다. 그는 1295년 6월19일 공식적인 행사를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1297년 11월 타브리즈에서 열린 공식 집회에서 가잔과 신하들은 챙이 넓은 몽골식 모자를 벗고 페르시아의 전통적인 터번으로 바꾸었다. 가잔의 이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 훌레구가 세운 일 칸국은 스텝전통이 종식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⑺사파비와 콰자르 왕조 시기1502-1925

사파비 왕조 시절 페르시아는 시아파 이슬람으로 변모하였다. 사파비왕조는 7대 이맘의 후손인 이스마일이 타브리즈에서 창건한 왕조이다. 이 왕조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한고 아랍적인 잔재를 몰아내고 이란의 정통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한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한 왕조였다. 그러므로 사파비 왕조에서는 아랍적인 색채보다는 페르시아적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진다. 한 예로 지배자를 뜻하는 아랍식의 술탄 대신 페르시아의 고대 칭호인 샤를 도입하였고, 종교 역시 다수인 수니파 대신 소수인 시아 이슬람을 국교로 삼았다.

이 시기의 페르시아의 유대인들의 상태는 악화되었다. 시아 무슬림은 종교적으로 청결한고 순수하고, 유대인을 포함한 비 무슬림은 종교적으로 순수하지 않게 취급되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무슬림과 공적인 장소에서 접촉하는 것도 차단되었다. 이들 가운데 과격파는 종교적 순수함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눈과 비가 오는 날이면 그것조차 불결하다고 생각하여 밖에 나가는 것을 꺼릴 정도였다.

샤 아바스Shah Abbas(1588-1692)의 치세 초기에 새 수도인 이스파한에 유대인들의 정착을 장려하면서 페르시아의 유대인들을 잘 대해주었다. 그러나 통치 후기로 가면서 유대인들을 가혹하게 대하였다. 시아파 성직자들은 개종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에게 구분되는 모자와 옷과 표지를 달도록 강제하였다. 1656년 샤는 이스파한의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도록 명하였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불결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을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이는 유대인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지즈야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유대인 개종자들이 비밀리에 유대교 의식을 행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1661년 유대인을 개종시키는 조치는 철회되었지만 이들이 유대인임을 상기시키는 표시로 모자와 옷과 특별한 표시를 하도록 하는 것은 더욱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나디르 샤Nadir Shah(1736-1747) 치세에 유대인들이 시아파의 성지인 마쉬하드Mashhad에 정착해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란사람들은 마쉬하드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그리고 생존자들을 강제로 개종시켰다. 알라하다드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강제 개종당한 유대인들은 Jadid al-Islams으로 불렸는데 이는 새로운 개종자란 뜻이다. 하지만 강제로 개종한 대부분은 유대인의 종교적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박해와 개종의 위협속에서 마쉬하드의 공동체는 1946년 이란을 떠나 이스라엘에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고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알라하다드 사건Allahdad incident은 1839년 이란의 유대인들이 대대적으로 박해를 받은 사건이다. 유대인 공동체가 폭도들에게 습격을 받아 회당이 불타고, 주택은 약탈당하고, 소녀들이 납치되었으며, 30-4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유대인 가장들은 칼로 위협하는 가운데 이슬람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했다. 그리고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들 역시 이슬람에 대한 충성을 서약함으로서 대부분 강제 개종한 2천 4백여 명의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개종자는 마쉬하드에 머물렀고 이름도 이슬람식으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소수는 다른 이란 유대인 공동체나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났다. 이 날은 유대인들에게 그들 죄에 대한 하느님의 응징으로 받아들여져 알라하다드Allahdad ("하느님의 정의") 로 알려져 있다.

1794년 콰자르 왕조가 들어서면서 유대인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대영제국의 커즌 경은 페르시아 유대인의 종교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스파한에 3천 7백 명의 유대인들은 다른 지역의 유대인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다. 이들에게 페르시아의 머리쓰개나 콜라흐kolah를 입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시장에서 장을 보거나 자신의 집 담장을 이웃의 이슬람 교도의 담장 보다 높게 세우면 안 되었다. 또 거리에서 말을 타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테헤란이나 카샨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대등하게 즐긴 반면에 시라즈에서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부쉬르에서는 박해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커즌 경의 기록을 보면 이란의 유대인 공동체는 지역적인 차이에 따라 박해와 공존을 경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란은 19세기 유럽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시아파 성직자들의 선동에 의해 이교도에 대한 박해와 개종은 여전히 강요되었다. 1830년 타브리즈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하였고, 같은 해 시라즈의 유대인들은 강제로 개종 당하였다. 유럽의 여행자들은 타브리즈와 시라즈의 유대인들은 박해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유대교를 고수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유명한 이란계 유대인 교사인 물라 다우드 카디Mullah Daoud Chadi는 이란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대인들에게 유대교를 가르치고 설교하였다. 1866년 바포르쉬의 유대인들이 강제로 개종 당하였다. 프랑스와 영국의 외교관이 이 사태에 개입하여 중재하였음에도 바포르쉬에서 18명의 유대인들이 폭도들에게 살해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1910년 쉬라즈의 유대인들이 이슬람 소녀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거행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으로 이란의 유대인 1/4이 무슬림들에게 약탈과 폭행을 당하였다. 지방 정부는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12명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려다 살해되었고, 무수한 유대인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런 박해를 피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오토만의 지배 아래 있던 이스라엘로 탈출하였다.

 
⑻팔레비 왕조 시기 Pahlavi dynasty1925-1979와 이슬람 혁명 이후1979-현재

이란 거주 유대인들의 전성기는 팔레비 왕조 시대였다. 이 시기에 이란의 유대인들은 레자 샤Reza Shah와 성직자들 사이에 불화로 인해 성직자를 탄압하여 이들 성직계급이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위로부터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통해 사회적인 제약이 사라지고, 소수 종교에 대한 차별이 철폐되면서 이란 내 비교도들의 삶이 향상되었다. 이 시기에 이란의 유대인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레자 샤는 유대인들의 대량 개종을 금지하였고, 비 무슬림은 불결하다는 이슬람적 사상도 철폐하였다. 그리고 유대인 학교의 교과과정에 현대 히브리어를 집어 넣는것도 허락하고 유대인 신문도 발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도 공무원이 될 수 있게 공직에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레자 샤의 진보정책은 일시적으로 유대인 사회에 구원을 주었다. 하지만 1920년대 공황기를 지나며 유대인 학교는 문을 닫았고, 1930년대 레자 샤의 친 나치 성향으로 이란의 유대인들은 위기를 맞았다. 소수민족과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반유대주의 기사가 대중매체를 통해 홍보되었다. 1948년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이스라엘-가 건설되면서 이란에서 반 유대주의 정서가 증대한다. 1953년까지 샤와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모사데크Mohammad Mossadegh 사이의 정치적 투쟁에서 성직자들이 모사데크를 지지하면서 중앙 정부의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 1948-1953년 사이에 이란 유대인의 1/3이 가난에 허덕였고, 이들 대부분이 이스라엘로 떠났다.

1948년부터 1978년까지 대략 7만 명의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떠났다. 1948년 이란에는 약 4만에서 15만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30년 사이에 대략 반 이상의 유대인이 이란을 떠난 것으로 보고 있다. 모사데크가 축출된 1953년 이후 샤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shah Mohammad Reza Pahlavi가 즉위한 이후 이란의 유대인들은 번영의 시기가 도래한다. 1970년대 이란의 유대인 가운데 오직 1%만이 최하층이었고, 80%는 중류층, 10%는 상류층으로 분류되었다. 유대인의 인구 비율이 이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낮지만, 1979년 당시 이란 과학 아카데미 회원 18명 가운데 2명이 유대인이었다. 4천 명의 대학 교수 가운데 80명이 1만 명의 의사 가운데 6백 명이 유대인이었다. 1979년 이란 혁명 전에 이란에 8만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테헤란에 6만 명, 시라즈에 8천, 케르만샤에 4천, 이스파한에 3천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였고, 이밖에도 쿠샨, 사만다즈, 하마단, 타브리즈에도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중동지역 아랍국가 가운데 이란에 가장 많은 거주자를 두고 있다. 1978년 혁명 당시 이란에는 대략 7만에서 8만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대략 2만 명이 혁명을 피해 이스라엘과 미국으로 떠났다. 그럼에도 현제 이란에는 5만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 숫자는 중동에서 가장 큰 유대 공동체가 이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이란이 혁명으로 신정정치神政政治를 구현하게 되면서 이란의 유대인들은 더욱 종교적인 공동체로 변모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란의 유대인들은 더욱 철저히 안식일을 준수하고 세속적인 오락에 거리를 두면서 종교적인 공동체로 변모하였다. 이것은 이란의 혁명정책에 유대인 공동체가 협조하면서 생겨난 자연스런 현상이면서 유대적인 종교적 심성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협력은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신정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중단되지는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이란이 이스라엘을 적대시 하였지만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서방세계가 이란을 적대시하고 이라크를 지원하였을 때 이란을 뒤에서 도와준 국가가 이스라엘이었다. 특히 이란이 장비한 미국제 군사장비의 부품을 이란에 판매한 것이 이스라엘이었다. 그리고 이란 역시 이스라엘을 통해 군사장비를 수입하였다. 이스라엘은 다국적 연합군을 통해 이라크의 핵무장을 저지했지만 이라크가 사라진 다음 이 지역의 맹주로 떠오른 이란의 핵무장을 근심스런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만약 이란의 핵무장이 확실시 된다면 이스라엘은 자위권 차원에서 이라크의 오시라크 원자로 폭격사건처럼 이란의 핵무장 시설을 기습 공격할 것이 확실하다. 이렇게 된다면 이 지역의 군사적 긴장관계는 엄청난 상승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튀니지를 시작으로 시민혁명이 중동지역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이스라엘은 더 큰 위협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각 지역의 정치적 붕괴는 그동안 이스라엘이 비공식적으로 개설해 놓은 모든 대화 통로가 사라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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